<만화가의 권리찾기(9) - 출판계약과 만화 원고의 보관의무>

: 서울남부지방법원 2004. 6. 3. 2003가합2452 판결

이영욱 



1. 들어가며


만화가가 만화 원고(原稿)를 작성하여 이를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맺고 출판사에게 인도한 경우, 위 만화 원고에 대하여 문제될 수 있는 권리는 ①원고 자체에 대한 소유권과 ②만화의 저작권이다.


이번 회에서 다루는 우리나라 판례(서울남부지방법원 2004. 6. 3. 선고 2003가합2452 판결, 판결 확정)는 만화가의 만화 원고를 보관하다가 분실한 만화출판사의 책임에 대한 판례이다. 이 때, 만화가가 출판사에 대하여 만화 원고 분실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하여는 위 만화 원고에 대한 권리가 만화가에게 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 ‘원고 보관의무’라는 측면에서는, 만화의 저작권보다는 주로 만화 원고의 소유권이라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이다.


2. 판례의 내용


(1) 사실관계


원고 만화가 A는 1993. 4. 8. 피고 B출판사와 중국 삼황오제부터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중국의 역사책을 극화한 ‘만화 C’라는 만화 10권을 작화•출판하기로 하는 출판권설정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계약의 주요 내용으로


‘(1) 원고는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 만화에 관한 출판권을 설정하고, 피고는 그 복제 및 배포에 관하여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다.(계약서 제1조)

(2) 이 사건 만화의 출판권은 초판 발행일로부터 만 5년간 존속하고, 원고와 피고 중 어느 한쪽에서 계약 만료일로부터 6개월 전까지 계약 해지의 통고가 없는 한 위 계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자동적으로 갱신되어 유효기간이 3년간 연장되는 것으로 한다.(계약서 제4조 제1, 2항)


(3) 원고는 이 사건 만화 중 1~3권은 1993. 12. 30.까지, 4~10권은 1994. 10. 30.까지, 출판을 위하여 필요하고도 완전한 원고(原稿)를 피고에게 인도한다.(계약서 제5조 제1항)

(4) 이 사건 만화의 저작에 필요한 비용은 원고가 부담하고, 제작•선전 및 판매에 따른 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계약서 제8조)


(5) 작화료는 150,000,000원(= 면당 60,000원×250면×10권)으로 하고, 각 권당 30,000부 이상의 판매분에 대해서는 권당 정가의 10%를 인세로 지급한다.(계약서 제11조 제1항)

(6) 피고는 원고에게 현장 답사 및 자료 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한 달간의 중국 여행경비를 제공한다.(계약서 제12조)’는 내용이 있다. 


원고는 위 계약에 따라 1994. 5.경부터 1998. 8.경까지 이 사건 만화 10권 총 2,560면 상당의 원고를 그려서 피고에게 인도하였고, 피고는 이를 스캔파일로 제작•편집한 후 인쇄필름을 만들어 만화를 인쇄•출간하였다.  


원고는 2002. 7. 13. 피고에게 이 사건 출판계약이 2002. 10. 30.자로 종료됨을 통고한 후 2002. 8. 14. 피고에게 만화 원고를 반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피고는 만화 원고를 분실하여 그 요구에 응하지 못하였다. 


피고가 이 사건 만화 원고를 바탕으로 제작한 스캔파일을 원고가 사용하는 특별한 도화지에 출력한 결과, 그 세밀도는 원화에 못지 않고 수정작업을 함에 있어서도 원화와 거의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2) 법원의 판단


① 만화 원고의 소유권의 귀속에 대한 판단


우선 법원은 만화 원고의 소유권은 만화가에게 있음을 전제로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는 원고로부터 이 사건 만화에 대한 출판권만을 설정받았으므로 그 편집•출간을 위하여 원고로부터 교부받은 이 사건 원고를 잘 보관하였다가 원고에게 반환하여야 함에도 이를 분실하여 원고의 권리를 침해하였다 할 것이므로, 이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판단하였다. 


② 재산적 손해 부분


위 법원은 ‘이 사건 원고의 분실에 따라 원고가 입은 재산적 손해는, ① 이 사건 원고의 분실에 따라 이 사건 만화의 재출간이 불가능해짐으로써 발생하는 일실이익(또는 재출간이 가능할 경우에는 원고의 분실로 말미암아 재출간에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과 ② 이 사건 원고 자체의 재산적 가치(금전적 평가액)의 합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원고는 스캔파일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고 그 출력물의 질 역시 원화에 뒤진다고 할 수 없으며 수정작업을 함에 있어서도 원화와 거의 비슷한 효과를 가짐은 앞서 본 바와 같은바, 그렇다면 이 사건 원고가 분실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만화의 재출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거나 그 재출간에 추가 비용이 소요된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일실이익 내지 추가비용의 손해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이 사건 원고 자체의 재산적 가치는 분실 당시 시장에서 형성된 거래가격이  될 것이나, 만화원고에 대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현실하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분실 당시 이 사건 원고의 제작을 위하여 통상인이 지급할 대가, 즉 원고료(작화료)가 그 재산적 가치라고 봄이 타당하다.


...1993년 당시 이 사건 원고의 작화료,  원고가 만화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지명도, 이 사건 만화의 작품성과 대중적 인기, 이 사건 원고에 관하여 만화애호가들의 소장욕구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는 점, 원고가 대표작의 원고를 모아 만화박물관을 설립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면당 120,000원을 기준으로 하여 산출한 269,520,000원(= 120,000원 × 이 사건 원고 중 만화가 그려져 있는 2,246면)이 이 사건 원고의 재산적 가치라 봄이 상당하다.’ 라고 판단하였다.


다만, 위 법원은 ‘피고가 애초 1994. 10. 30.까지 모든 원고를 인도받기로 하였으나 원고의 사정으로 ...4년여가 경과한 1998. 8.경에 비로소 나머지 부분을 인도받은 데다가... 원고가 약 4년간 이 사건 원고의 반환요구를 지체하여 피고로 하여금 장기간 그 보관의무를 지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 사건 분실사고가 발생한 점 등은 이 사건 사고의 발생에 기여하였다 할 것이므로 ...피고의 책임비율을 70%로 제한함이 상당하고, 결국 원고의 재산적 손해는 188,664,000원(= 269,520,000원 × 0.7)에 달한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단하였다. 


③ 정신적 손해 부분


위 법원은 ‘...원고는 이 사건 원고의 분실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100,000,000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므로 살피건대, 일반적으로 타인의 불법행위 등에 의하여 재산권이 침해된 경우에는 그 재산적 손해의 배상에 의하여 정신적 고통도 회복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재산적 손해의 배상에 의하여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이는 특별한 사정으로 인한 손해로서 가해자가 그러한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 한하여 그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을 뿐인데, 이를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원고의 위자료 청구는 이유 없다.’라고 판단하였다.   


3. 판례의 검토


(1) 序


저작권과 저작물의 소유권(위 사안들에서는 만화 원고의 소유권)이 만화가, 출판사 중 누구에게 귀속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음의 네가지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법원은 저작권과 저작물의 소유권(만화 원고)가 모두 만화가에게 있음을 판시하고 있다.


(2) 저작권 부분


① 우리 저작권법에서는 저작권이 저작물을 창작한 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저작권법 제2조 제2항). 그렇다면 위 만화의 저작권은 저작물을 창작한 만화가가 원시적으로 취득한다.

다만, 저작재산권은 전부 또는 일부를 양도할 수 있는바(저작권법 제41조 제1항), 그렇다면 위 판례에서 저작권자인 만화가는 출판권설정계약으로써 저작재산권을 출판사에 양도한 것이 아닌가 문제된다.


② 일반적으로 출판이라고 하는 것은 저작물을 인쇄 그 밖의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문서 또는 도화로 발행하는 권리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고, 출판계약이라 함은 출판자가 복제, 배포권을 취득함과 동시에 복제, 배포의무를 부담하는 계약이라고 할 것이다.

출판계약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바, 크게 분류하자면 ①저작재산권 전부를 출판자에게 양도하는 저작재산권 양도계약, ②복제권과 배포권만을 출판자에게 양도하는 복제권, 배포권 양도계약, ③저작권자가 출판자에 대하여 출판을 허락하고, 이에 대하여 출판자는 자기의 계산으로 복제, 배포할 권리와 의무를 부담하는 출판허락계약, ④저작자와 출판자 사이에 체결되는 출판권의 설정을 목적으로 하는 준물권계약인 출판권설정계약으로 나눌 수 있다.


③ 우리가 살펴본 판례에서는 ‘출판권 설정계약’을 체결하였고, 위 계약서 1조에서는 ‘원고는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 만화에 관한 출판권을 설정하고, 피고는 그 복제 및 배포에 관하여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다.’라고 하였는바, 그렇다면 위 계약은 출판사로 하여금 단지 ‘복제 및 배포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갖게 하는 계약’으로서, 저작재산권의 양도계약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출판허락계약 내지 출판권설정계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④ 우리 판례에서는 이른바 ‘매절’ 계약(책 판매량과 상관없이 출판자가 저작권자에게 미리 한번에 저작물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계약)에 대하여도 ‘...신청인과 위 000 사이의 1987.3.31.자 계약은 저작물 이용대가를 판매부수에 따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일괄지급하는 형태로서 소위 매절계약이라 할 것으로, 그 원고료로 일괄지급한 대가가 인세를 훨씬 초과하는 고액이라는 등의 소명이 없는 한 이는 출판권설정계약 또는 독점적 출판계약이라고 봄이 상당하므로 위 계약이 저작권양도계약임을 전제로 하는 신청인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서울민사지방법원 1994. 6. 1. 선고 94카합3724 판결)라고 판시하여, 판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절계약도 저작권양도계약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위 사안에서 출판권 설정계약으로 저작권이 양도되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고 저작권은 여전히 원 저작자인 만화가에게 있다.


(3) 원고의 소유권 부분


① 만화 원고에 대해서는, 만화가가 만화원고지를 사서 원고지에 그림을 그려 원고를 완성할 때에 위 원고의 소유권을 원시취득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위 사안들에서 만화가가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맺음으로써 그 원고의 소유권을 양도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② ‘만화 C’의 경우 계약서 1조에서 ‘원고는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 만화에 관한 출판권을 설정하고, 피고는 그 복제 및 배포에 관하여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다.’라고 규정하였는바, 이것을 출판허락계약 내지 출판권설정계약이라고 한다면, 저작자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출판사에게는 복제권과 배포권만을 출판자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계약이라고 할 것이므로, 그 계약의 내용이나 당사자의 의사에 비추어 이는 ‘만화 원고의 소유권은 당연히 만화가에게 있음을 전제로’ 출판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원고를 출판사로 하여금 이용케 하는 계약이라고 할 것이므로, 소유권은 만화가인 A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4) 재산적 손해 부분


① 재산적 손해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판례에서는 ①원고의 분실로 인해 발생하는 일실이익 손해부분과 ②만화 원고의 분실 자체로 인한 재산적 손해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② 원고의 분실로 인해 발생하는 일실이익 손해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판례는 원고가 분실되었다고 해도 이것이 제판 필름 내지 스캔한 데이터에 의해 같은 형태로 재출판될 수 있다면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③ 한편, 만화 원고의 분실 자체로 인한 재산적 손해 부분에 대해 우리 판례는 이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만화가 A 선생 정도 되는 저명한 만화가의 경우 원고료가 최상급에 이르는 점, 제작된 만화원고 또한 수집용 등으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한편 일본 판례인 ‘천사의 달걀’ 판례(동경지방재판소 平成 14. 8. 26. 선고 2000ワ20514 판결)에서는 이 부분의 손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5) 정신적 손해 부분

우리 판례는, 통상의 다른 판례에서 설시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재산적 손해를 전보받은 경우 추가적으로 정신적 손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위 일본 판례에서는 대신 이 부분 위자료를 인정해 주었다).


4. 결론


만화 원고에 대하여 발생할 수 있는 권리는 만화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과 원고 자체에 대한 소유권이다.


저작권 부분: 이 경우 저작권은 원시적으로 저작자인 만화가에게 있고, 출판계약을 체결하여 만화가가 출판사에게 만화 원고를 넘겨주는 경우에도 통상 출판계약의 내용이 만화가가 만화 원고를 제작하여 출판사에게 인도하고, 출판사는 해당 만화 원고를 이용하여 책을 출판하는 출판허락계약 내지 출판권설정계약이므로 저작권이 양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출판사는 단지 일정기간 출판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갖고, 모든 저작권은 만화가가 갖고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저작권이 양도된 경우에는 출판사가 저작권(저작재산권)을 모두 행사한다.


만화원고의 소유권 부분: 만화 원고 자체에 대한 소유권은 만화가가 원시취득한다고 볼 것이고, 위와 같이 만화의 출판계약이 저작권은 만화가에 있음을 전제로 한 계약이라고 한다면, 출판계약은 단지 ‘출판’이라는 목표 달성에 필요한 기간 동안 출판사로 하여금 위 만화 원고를 이용하도록 하는 채권적 계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이를 만화 원고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하는 계약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만화 원고를 분실한 출판사는  만화가의 소유권을 침해함에 따른 손해배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 아예 만화 원고의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는 계약을 한 경우라면, 출판사가 만화 원고를 분실해도 이는 자기의 물건을 분실한 것이므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저작재산권을 양도한 경우라면 어떨까? 저작권을 모두 넘기면서, 작품 소유권만은 내가 가질테니 원고를 언제건 돌려달라는 의사가 분명히 표시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작재산권을 모두 양도한 것은 만화 원고의 소유권까지 양도하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 부분은 각 사안마다 계약서의 내용, 주변의 여러 사정, 당사자의 의사 등을 종합해서 ‘당해 저작권 양도 계약에 동산의 소유권까지 양도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는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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