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의 권리찾기(19) - 어문저작물과 만화의 저작권 침해

이영욱 변호사


1. 들어가며

만화를 창작함에 있어서 타인의 어문저작물을 이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바, 예컨대 만화가 고우영 작가는 ‘삼국지’, ‘초한지’ 등 주로 중국의 유명한 문학작품을 이용하여 만화 작품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홍은영 작가가 그린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만화가 보기 드물게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이 ‘삼국지’,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이미 공유의 영역(public domain)에 있는 어문저작물의 경우 이를 이용하여 만화를 그린다고 해도 저작권 침해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으나, 만화가가 저작권이 있는 타인의 어문저작물을 이용하여 만화를 그리는 경우가 문제됩다.

한편, 최근에 들어와서 만화가 어문저작물을 이용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거꾸로 어문저작물(또는 어문저작물에 바탕을 둔 드라마 등 영상저작물)이 만화를 임의로 이용하여 저작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2. 침해되는 권리


(1) 타인의 어문저작물을 이용하여 만화를 창작할 때에는 통상 어문저작물에 대한 복제권 내지 2차적저작물작성권 침해가 문제됩니다.

저작자가 기존의 저작물(원저작물)을 그대로 베끼거나, 사소한 수정만을 가하되 새로운 창작성을 가미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는 ‘복제물’에 불과하므로 원저작물의 복제권 침해가 발생합니다.


(2) 저작자가 기존의 저작물을 토대로 새로운 창작성을 가미하였지만, 기존 저작물에 대한 종속적 관계가 인정되는 경우, 이는 원저작물에 대한 ‘2차적저작물’이므로 원저작물의 2차적저작물작성권 침해가 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작물을 그대로 베끼거나, 사소한 수정만을 가한 경우에는 복제권 침해가 성립하므로, 가사 어문저작물을 이용하여 만화로 저작하였다고 해도, 원 어문저작물과 만화가 동일하거나, 원어문저작물에 가해진 개변의 정도가 ‘실질적 개변’(substantial variation)”에 이르지 못하는 ‘사소한 개변’(trivial variation)인 경우에는 2차적저작물작성권 침해가 아닌 복제권 침해가 성립합니다.


(3) 저작자가 기존의 저작물을 토대로 저작을 하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존 저작물과 동일성 내지 종속적 관계를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이는 ‘독립저작물’로서 기존 저작물과의 저작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3. 저작권침해의 판단기준

 

(1) 저작권 침해의 요건

일반적으로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1) 주관적 요건으로서 침해자가 저작권 있는 저작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이용하였을 것(의거성. access), (2) 객관적 요건으로서 침해저작물과 피침해저작물과의 실질적 유사성(substantial similarity)이 있을 것의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2) 의거성

‘의거성’이란 침해저작물이 피침해저작물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의거는 내심의 문제이므로, 침해자가 피침해저작물에 대한 접근(access), 즉 피침해저작물을 보거나 접할 상당한 기회를 가졌던 경우에는 의거성이 입증되는 것으로 보고, 현저한 유사성(striking similarity) 또는 공통의 오류(common error)가 있는 경우 의거를 사실상 추정합니다.


(3) 실질적 유사성

어문저작물의 실질적 유사성 판단은 보통 관찰자의 관점에서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고, 이를 읽음으로써 양자를 대비하는바, 어문저작물은 그 내용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개별적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분해식 판단방법’이 유용합니다. 여기서 부분적ㆍ문자적 유사성만 문제되는 경우에는 유사성 요소가 일응 확정되므로 유사성 요소를 찾기 위해 전체를 대비할 필요는 없으나, 포괄적ㆍ비문자적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는 전체를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1)

판례는 ‘하얀나라 까만나라’ 사건에서, “원고와 피고의 저작물을 비교해 보면 …원고의 이 사건 소설과 동일성이 인정되고, 부분적ㆍ문자적 유사성이 인정되는 이상, 피고 연속극 대본의 일부는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존재를 알고 이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비록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부분과 실질적 유사성이 있고 이른바 통상적인 아이디어(idea)의 영역을 넘어서 위 소설의 경험적ㆍ구체적 표현을 무단이용하였다고 보이므로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다”2)라고 판시하였는바, 침해된 분량이 일부이고 많지 않더라도 저작자의 창작성이 드러나는 중요한 부분이 유사하다면 실질적 유사성이 인정됩니다.


(4) 어문저작물 중 보호받을 수 없는 “아이디어성”이 강한 요소로는 ① 주제(작품에 나타난 기본적인 사상이나 아이디어), ② 세팅(작품의 배경), ③ 분위기(작품의 전체적인 느낌, 톤), ④ 속도(작품에 나타난 줄거리의 완급)를 들 수 있습니다.3) 

한편, 어문저작물 중 보호되어야 할 ‘표현성’이 강한 요소로는 ① 플롯(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가지 사건을 하나로 짜는 작업과 그 수법)이나 ② 사건의 전개과정(줄거리), ③ 등장인물, ④ 대사를 들 수 있습니다.4)


4..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는 경우

 

(1)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아이디어‐표현 이분법’에 따라, 만화가 어문저작물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닌 작품의 주제, 세팅, 개념(컨셉), 분위기, 속도 등만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습니다.


(2) 또, ‘합체의 원칙’에 따라 어떤 것을 표현함에 있어 오직 그 표현방법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습니다.5)


(3) 나아가, ‘표준적 삽화의 원칙’(Scenes a Faire)에 따라 소설 또는 만화에서 통상 등장하는 필수장면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4) 또한 어문저작물 중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전기적 저작물이나 논픽션저작물의 경우 그 저작물의 본질을 이루는 사건(episode) 및 전개과정(sequence) 자체는 저작자가 고유한 창작적 표현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이 아니므로, 그에 대하여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5) 기타 저작권법상 저작재산권의 제한의 경우(법 제23조 내지 제36조), 이미 공중의 영역(public domain)에 속하게 된 어문저작물에 대해서도 저작권 침해가 될 여지가 없습니다.

 

 

5. 마치며

이번 원고는 생소한 저작권법적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여 약간 어려운 내용일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표절”과 법원에서의 “저작권 침해”는 약간 다른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는 것을 알아두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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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영준, 저작권침해판단론, 박영사(2007), 167~168면.

2) 서울고등법원 1995. 10. 19. 선고 95 나 18736 판결.

3) 권영준, 전게서, 170~174면.

4) 권영준, 전게서, 174~184면.

5) ‘태왕사신기 사건’에서는 “어떠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한 가지 방법만 있거나, 하나 이상의 방법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인 또는 개념적인 제약 때문에 표현방법에 한계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한 표현은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되지 아니하거나 그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모방한 경우에만 실질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7. 7.13. 선고 2006나16757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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