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의 권리찾기(32) - “하얀나라 까만나라” 사건>

 

이영욱(변호사)


 

1. 들어가면서

이번 회에서는 만화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저작권 침해에 관하여 우리나라에 선도적 판례로서 의미가 있는 사건을 살펴봅니다.
본 사건은 검사생활을 마치고 변호사 생활을 하던 원고가 자신의 검사 및 변호사로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얀나라 까만나라”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는데, 피고인 방송작가가 쓴 드라마 방송대본이 소설의 저작권을 침해했는지가 문제된 사안입니다. 
본 사건에서는 저작권 침해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방송작가의 저작권침해가 인정된다면, 그 방송대본을 갖고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한 피고인 방송사(다만, 사안에서는 “방송사”와 “방송국 소속 제작사”가 등장하지만, 간단하게 이를 모두 방송사로 다루었습니다)의 저작권 침해도 인정될 것인가라는 쟁점이 다루어졌습니다(서울고등법원 1995.10.19. 선고  95나18736 판결, 대법원 1996. 6.11. 선고  95다49639 판결).
즉, 원고는 소설을 쓴 변호사이고, 피고는 방송작가(피고 작가)와 방송사(피고 방송사) 둘입니다.

 

2. 사실관계

원고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검사로 임관하여 6년간 검사로 재직하다가 퇴직하여 개업을 한 변호사로서, 그 동안의 자신의 검사 및 변호사로서 일하면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젊은 법조인이 검사 및 변호사로서 활동하며 겪게 되는 고민과 갈등을 집필하여 "하얀나라 까만나라"라는 소설을 발행하였습니다.
피고 작가는 피고 방송사로부터 주말연속극 "연인"의 방송대본집필을 의뢰받고 검사, 변호사, 기자, 서양화가 등 2, 30대 연령층의 전문직업인들의 일과 사랑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구성하는 내용으로 50회분의 대본을 집필하였습니다.

원고의 소설은 30대의 젊은 주인공이 검사 및 변호사라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다룬 소설로서 소설에는 주인공이 검사로서 피의자 등과 업무상 만나면서 그 사건 처리과정에서 일어나는 조직 내부의 업무처리에 관한 사실적 표현과 변호사로서 개업하여 피의자나 소송의뢰인들과 접하면서 사건을 수임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관한 사실적 표현이 그 주요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연인"이라는 연속극의 대본 중에도 검사 및 변호사로 나오는 등장인물이 각 수사하거나 수임하여 처리하는 사건에 관한 구체적, 사실적 표현 및 위 주인공들과 주변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가 나오는데 그 중에는 예컨대, 원고의 소설에 나오는 변호사가 맡게 되는 첫 사건과 피고의 대본상의 주인공인 변호사가 맡게 되는 첫 사건, 원고의 소설에 나오는 검사와 피고의 대본상의 주인공인 검사가 기소유예처분을 하는 사건내용이 각 주거침입절도죄로 동일하고 처분을 하게 되는 경위도 동일하며, 소설에서 나오는 "77고합1024호 강도치사"의 사건번호를 방송대본에서 그대로 이용하는 등의 동일 또는 유사점이 있었습니다.
 
3. 저작권침해 여부 및 판단기준에 관하여(고등법원 설시 중)

 

(1) “이른바 어문저작물 중 소설, 극본, 시나리오 등과 같은 저작물은 등장인물과 작품의 전개과정(이른바 sequence)의 결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작품의 전개과정은 아이디어(idea), 주제(theme), 구성(plot), 사건(incident), 대화와 어투(dialogue and language)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러한 각 구성요소 중 각 저작물에 특이한 사건이나 대화 또는 어투는 그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것이(다).”

 

(2) “저작권 침해가 인정되기 위하여서는 침해자가 저작권이 있는 저작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이용하였을 것과 저작권이 있는 저작물과 침해자의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인 유사성이 있어야 할 것인데, 실질적 유사성에는 작품속의 근본적인 본질 또는 구조를 복제함으로써 전체로서 포괄적인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이른바 포괄적 비문자적 유사성:comprehensive nonliteral similarity)와 작품속의 특정한 행이나 절 또는 기타 세부적인 부분이 복제됨으로써 양저작물 사이에 문장 대 문장으로 대칭되는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이른바 부분적 문자적 유사성:fragmented literal similarity)가 있다고 할 것(이다).”

 

(3) “...원고의 소설과 피고의 "연인"이라는 연속극의 대본을 비교해 보면, 원고의 소설과 위 피고의 대본 사이에는 소설과 대본이라는 표현형식, 그 주제 및 구성에 있어서는 전체적인 개념과 느낌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인정되나 그 구성요소 중 일부 사건 및 대화와 어투에 있어서 공정한 인용 내지 양적 소량의 범위를 넘어서서 원고의 이 사건 소설과 동일성이 인정되고, 부분적 문자적 유사성이 인정되는 이상, 위 피고의 "연인"이라는 연속극의 대본의 일부는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존재를 알고 이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비록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부분과 실질적 유사성이 있고 이른바 통상적인 아이디어(idea)의 영역을 넘어서 위 소설의 경험적, 구체적 표현을 무단이용하였다고 보이므로 원고의 이 사건 소설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고 할 것이다.”

 

(4) 법원은 위와 같이 저작권 침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거성과 실질적 유사성의 두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면서, “실질적 유사성”은 작품속의 특정한 행이나 절 또는 기타 세부적인 부분이 복제됨으로써 양 저작물 사이에 문장 대 문장으로 대칭되는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부분적 문자적 유사성) 뿐 아니라 전체로서 포괄적인 유사성이 인정되는 경우(포괄적 비문자적 유사성)도 있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즉, 실질적 유사성은 반드시 문언, 표현 하나하나가 똑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근본적인 본질 또는 구조를 복제하는 경우에도 저작권침해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4. 방송사의 책임에 대하여(고등법원 설시 중)

 

(1) 원고의 주장: “원고는 ...피고 방송사는 피고 작가가 대본을 집필한 드라마 "연인"을 기획하고, 제작함에 있어서, 원고의 소설이 국내일간신문에 소개되는 등으로 피고 방송사는 피고 작가의 대본이 원고의 이 사건 저작권을 침해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 대본을 감독, 심의할 주의의무를 위배하여 그대로 드라마로 방영함으로써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 작가와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원고가 입은 손해액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2) “그러므로 피고 방송사가 피고 작가의 저작권 침해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위 대본을 감독, 심의할 주의의무를 위배하였는가의 여부를 살피건대, 이를 인정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없고, 오히려 (증거)에 의하면 피고 방송사는 1993. 2. 12.경 새주말연속극을 기획함에 있어서 관계자들의 기획안과 이야기 줄거리(시높시스)를 검토하여 "연인"이라는 제목의 연속극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피고 방송사는 위 연속극의 작가로 피고 작가와 대본집필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위 계약체결시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계약사항에 명기한 사실, 일반적인 드라마제작은 작가가 이야기 줄거리를 완성하여 피고 방송사의 승인을 얻으면 그 때부터 작가는 대본을 작성하기 시작하고 대본이 완성되면 그 대본에 대하여 피고 방송사가 심의를 하는데, 그 심의대상은 통상 대본의 내용이 방송에 적합한 지 여부에 국한되고 대본의 줄거리나 내용 등은 작가의 책임과 재량에 맡겨져 있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3)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 방송사와 피고 작가의 사이에 사용자 및 피용자의 관계가 존재하지 아니하는 이상 피고 작가의 저작권 침해 여부에 대하여 피고 방송사가 특별한 주의, 감독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고 달리 피고 방송사가 원고의 저작권침해를 방지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태하였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결국 위 피고들에 대한 원고의 위 청구는 이유 없다고 할 것이다.”

 

(4) 법원은 위와 같이 설시하여, 방송작가가 만든 드라마는 저작권 침해가 성립하지만, 이를 제작, 방송한 방송사의 저작권 침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5. 판례에 대하여

 

본 사안은 1995년경 사건인데, 위 사건의 원고는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님이십니다. 인품과 법률 지식도 훌륭하신 분인데, 당시 사회 일반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너무 없고, 또한 방송국에서 너무 안일하게 저작권 문제를 생각하는 것 같아 소송을 제기하셨다고 합니다(결국 방송국에 대한 소송은 지긴 했지만, 사실관계에 따라 방송국의 책임도 충분히 인정될 만한 사안입니다).
위 사건에서 재미있는 것은 원고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 번호(77고합1024호 강도치사)는 원고가 만든 가공의 사건번호인데, 피고 작가가 그것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작권 침해 사건에서 양 저작물에 남달리 똑같은 점이 나타나면, 침해가 비교적 쉽게 인정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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